▲ 탄탄스님(전 용인대 객원교수, 현 동국대 출강) |
흔히들'가깝고도 먼나라'를 말하라면 서슴없이 일본을 지목한다. 지정학적으로 근접해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지난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일제 강점기 그리고 그 보다 더 소급하여 보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우리의 국토를 유린하고 민중을 도탄에 빠지게 한 나라가'멀고도 가까운 나라'일본이다.
한국인에게 일본에 대한 풀리지 않는 어떤 감정이 속내 깊이 자리한 이유이다. 그 분풀이가 내면에서 밖으로 표출될 때가 간혹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스포츠이다. 단순한 친선게임이라 할지언정 결코 일본에게는 패배할 수 없다는 강렬한 승부욕이 불타오른다. 어쩌다 한·일간의 축구시합이라 벌어지는 날이면 온 국민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목청이 쉬도록 응원전을 펼친다. 이는 일본에 대한 이유있는 반감과 지난 식민지역사에 대한 치욕감이 근저에 뿌리 깊게 박힌 이유라고 본다.
근래에 윤석열 정부에서 일본과 점진적인 화해 무드로 들어가고 있어 어떤 우리 정서의 변화가 주목되기도 하지만 지피지기라 했다. 끊임없는 전쟁을 일으켜 온 일본의 속성을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서 극일이란 국가의 명운이 달린 일이기도 하기에.
일본의 중세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를 살펴보자. 우리 역사에서 지배세력이 문치(文治)였었던 반면 일본은 700여년 동안 무력(武力)과 무도(武道)를 바탕으로 한 무사(사무라이)들이 일본사회를 통치해 왔다.
무사들이 숭상하고 의존하는 것이 '칼'이다. '칼'에 의한 정치를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면 그 세계관이 어떻게 될까. 지금의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지배 해 온 무사들의 정신세계에 대해서 이해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일본은 근세 19세기까지도 고스란히 골품제가 남아 있었을 정도로 강력한 귀족제의 국가였으며 중세에는 소수 교토의 귀족들이 관직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귀족들과 불교의 사찰은 율령제가 무너지면서 기득권 유지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전국 곳곳에 산재한 광대한 장원을 지키고 경영해야했기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민초들을 지배하고자 온갖 술수를 짜내었다. 그때 등장한 신흥세력이 무사였다. 귀족 계급들은 그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사무라이를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칼을 쥔 무사들은 다이묘를 중심으로 급격히 힘을 키우며 점차 독자적으로 세력을 굳혀 나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황가는 아예 무사계급을 통치의 한 축으로 이용하려들고 세금과 노동력을 받아 챙기려는 그 과정에서 무사들은 세력다툼이 빈번해지고 막강해진 군사력을 바탕으로 쟁투와 세력권을 확장코자하는 끊임없는 전란이 하루도 그칠 날이 없었다.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며 천황가도 속수무책이었다. 오히려 무사들의 세습과 권력안보를 묵인해주며 천황의 권위를 지키려했다. 정통적 권부를 상징하던 막부가 막상 이름뿐인 권부로 전락하는 사이,전국의 다이묘들은 날이 갈수록 독자세력화하며 힘을 키우고 영지를 넓혀갔다. 그 과정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자웅을 겨뤄 약육강식의 세계,즉 강한자가 살아남았다. 그들은 이 시기를 '센코쿠 시대',이를테면 '전국시대'라 칭하였다. 이 전국시대는 늘 하극상이 난무하고 능력과 세력이 있는 자라면 어제의 주군도 무참히 살해할지라도 사회적으로 크게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던 비정한 세상이었다. 그러다보니 하루아침에 어제의 세력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력이 들어서기 다반사였으며 전란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사회는 도탄에 빠지고 민초들의 피폐한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없다.
기아와 질병,그리고 전쟁의 참화는 악인악과(惡因惡果)로 나타나 그 고통과 고단함은 형언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지옥 같은 세상 속에서 한편으로는 변화가 있었으니, 기존의 신분관계를 무너뜨린 지방의 다이묘들 사이에서 서서히 중추세력이 재편되면서 초강자가 떠올랐으며 특히 오다노부나가 그의 휘하에 도요토미히데요시, 도쿠가와이에야스라는 가신이 돋보였다. 이들이 지금도 '삼영걸(三英傑)'로 불린다. 당시 이들의 활약상은 현재까지도 역사적 평가를 받으며 세평에 심심치 않게 오르내린다.
삼영걸 그들의 처세론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이들 삶은 지금도 일본사회의 평범한 샐러리맨들 사이에서 술자리의 주제가 될 정도로 그네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우리가 '풍신수길'로 부르는 그는 오다노부나가의 게다(신발)당번병이었다. 미관말직의 직책으로,미천한 존재였지만 뛰어난 지략으로 중요 가신 반열에 올라 최측근이 됐다. 그는 주군의 명을 받들어 주코쿠지역의 모리씨를 토벌하러갔다. 하지만 열세에 몰렸던 히데요시는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노부나가는 출전 전에 즐겨 불렀던 아츠모리(敦盛), "인간사 50년,돌고도는 세월에 비하면 한낱 덧없구나,태어나 죽지 않는자 그 어디에 있겠는가"를 읊은 후 전장으로 향했다. 때는 서기 1582년 6월2일,노부나가는 49세,히데요시는 46세였다.
노부나가는 히데요시를 지원하는 출전을 하기 전 교토의 혼노지(本能寺)라는 사찰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가신 아케치미쓰히데가 돌연 군사를 이끌고 어제 까지는 주군이었던 노부나가를 습격했다.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하극상이었다. 백여명 남짓 근위대만 곁에 두었던 노부나가는 직접 창을 들고 맹렬히 싸워 보았지만, 일만 삼천여명의 병력 열세를 도저히 감당 할 수가 없었다. 노부나가는 스스로 최후를 직감하고 혼노지에 불을 지르고 화마 속으로 장렬하게 뛰어 들었다. 천하포부의 기치를 걸고 눈앞에 그 목적이 실현되어가던 순간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이 비운의 사나이 오다가 죽고 나니 히데요시에게 천하의 기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모리씨와 화친을 맺고 주군을 살해한 배반자 아케치 미쓰히데를 응징하는 전략으로 권력 공백기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이후 수많은 전란을 거치며 히데요시는 8년 후에 천하를 통일했다. 훗날 당연한듯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야심가 히데요시는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을 치고 인도까지 손에 넣어 가신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준다는 허황된 욕망을 실현하겠다고 조선은 길잡이 노릇을 하라며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에는 히데요시를 능가하는 진정한 영웅,세계 해전사(海戰史)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위대한 사령관 이순신이 버티고 있었다.
일본을 천하통일 한 히데요시도 이순신 장군의 벽은 넘지를 못했다. 이순신이 지키고 있는 한 왜군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히데요시에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는 계부의 슬하에서 온갖 멸시와 구박을 받으며 16세가 되던 해 집을 나와 친부가 유산으로 남겨준 영락전(永樂錢)을 종잣돈으로 삼아 바늘 장수를 하며 천신만고 끝에 오다노부나가의 하급무사가 되어 아시가루 조장(組頭)정도의 변변치 못한 지위였으나, 주군 노부나가의 신임을 얻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던 히데요시는 그 덕분에 신분상승을 이루고 어느덧 오다 가문의 중요한 가신으로 등극하여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간바쿠(關白),다이코(太閤)가 되어 최고의 지위에 오른 그는 금,은 보화를 산더미처럼 획득하고 사후에도 명성과 권세를 전하는 것을 그토록 소망 했지만,그 지위와 업적도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는 결국 허망했다.
"몸이여,이슬로 와서 이슬로 사라지는 게 인생이런가,오사카의 영화여,꿈속의 꿈이었구나”. 우리 민족에게는 철천지 원수이기도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렇게 절명시(辭世句)한 편을 남기고 꿈속의 꿈처럼 인생사의 허망함을 노래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천하를 내어준 뒤 풀잎에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참고 인내하고 수모와 멸시를 감내하며 견디고 기다린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막부를 세워 새로운 시대를 열자 후세의 사람들은 "오다 노부나가가 쌀을 찧어 도요토미가 반죽한 떡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먹었다" 라고 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허름한 술집에서 이 삼영걸의 삶과 죽음을 자주 들을 수 있다. 그만큼 일본인들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우리도 지난 시절,3김이 가신정치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뉴스에서는 늘 동교동,상도동,청구동의 3김이 살던 동네를 자주 비추며 미주알고주알 그들의 동정을 보도했다. 그때의 속사정을 들어보면 우리나라 정치도 일본 전국시대와 매우 흡사하거나 맞닿아 있다.
박정희는 메이지 유신을 모방한 10월 유신으로 전권을 휘둘다 자신의 근위대수장 김재규의 하극상으로 목숨을 잃었다. 소수의 측근들과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을하다 총을맞고 생을 마친다. 노부나가의 야망을 읽기도했다던 박정희의 허무한 마지막이었다.
오다노부나가의 장인이기도 하며 혼노지의 간웅 아케치미쓰히데의 주군 '사이토 도산'도 하극상을 통해 상전들을 쳐내고 절의 승려에서,기름장수 끝에 성주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으나,인생사가 돌고 돈다하지 않던가,결국은 자기 아들의 공격에 패배하여 무참히 목이 날아가 죽었다.
3김 가운데 JP는 정치와 권력이 '헛되다'는 의미로'허업'이라 했다. 사이토 도산이 그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는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말년에는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막후에서 조정하려 했다. 이때 가신 중에서 이중권력의 부작용을 말해 주는 이가 있었으나 그는 귀담아 듣지 를않았다. 몇 년도 가기 전에 부자간에 갈등이 불거졌다.
사이토 도산은 장남에게 영주자리를 물려준 걸 후회하고 차남으로 영주를 교체하려하자,이를 눈치 챈 도산의 장남은 1만 대군을 동원하여 아비를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사이토 도산도 이에 질세라 군사를 모아 싸우려 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수십년 동안 영주였고 연전연승한 무장이었음에도 사이토 도산의 옛 부하들은 도산을 버리고 도산의 장남에게 붙었다. 심지어 사이토 도산에게 이중권력 상태를 만들지 말라고 조언한 가신조차도 도산의 장남에게 가버렸다. 사이토 도산이 지난 시절 전장에서 쓰던 뿔나팔을 불며 옛 부하들을 오라고 아무리 신호를 하여도 다들 외면했다고한다.
결국 도산은 1~2천명 정도 되는 소규모의 군사로 장남의 1만 대군과 싸우다 죽음에 이른것이다. 이 싸움에서 사이토 도산의 부하들은 절묘한 수 를 계산한다. 그들 입장에서는 다 늙은 사이토 도산이 이겨도 미래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차남을 억지로 영주로 세우는 과정에서 혼란만 더 가중 될 것이 뻔하다고 본 것이다. 이에 반해 도산의 장남이 이기면 혼란이 짧게 끝난다는 판단이 나오자 모두들 도산의 장남 편에 붙어 버렸다. '저무는 권력보다 떠오르는 권력에 모여드는 인간군상'이 그려지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이처럼 수많은 하극상이 난무했고 배반과 반역의 우리 역사에서도 어부지리로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떡방아를 누군가 날름 집어 먹었다.그 이후 이나라의 정치도 엇비슷하게 전개되어 왔다 .
먹고 먹혀지는 인간사슬,역사는 늘 돌고 돈다. 혼돈스러운 오늘의 정치판을 보고 있노라면 풍랑에 휘말린 대한민국호의 안위도 심히 걱정스럽다. 어느누가 선장이 되어 이누란에 처한 나라를 침몰하지 않도록 잘 이끌것인가? 심히 궁금해질 뿐이다.
"태어나 죽지 않는자 그 어디에 있겠는가,권력과 부귀영화가 꿈속의 꿈인듯 하다." 이글을 쓰는 순간 귓가에 울리는 소리다.
탄탄스님 shl034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