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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단상(山中斷想)] 중국의 소림사에서-예고된 몰락

기사승인 2024.09.16  18: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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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탄스님(서래사 주지 .동국대 출강)

뒤 늦은 무더위가 영 가실 줄을 모르더니 아침 저녁 기온차가 사뭇 피부에 와닿는다. 완연한 가을은 조금 더 멀었지만, 이제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온듯도 하다. 흔히들 가을은 독서와 사색의 계절이라고한다. 그러니 진중한 생각을 하기에는 가을의 여행보다 더 좋은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지인과 중국에서 요며칠째 머물고 있다. 어릴적부터 무협지와 무협영화광이었던 필자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소림사를 가기 위해서였다. 선종의 요람이기도 한 소림사의 스토리텔링은 널리 전세계인들에게 익히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영향에서 인가, 무술의 고수가 되려는 어린 수련자들이 넘쳐나는 소림사 근처에는 많은 무술학교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소림사가 위치한 하남성의 정주와 그 경계의 산시성의 웅장한 협곡과 산맥은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했으며 한참을 가도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이며 숙소로 돌아오면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었던 덕해당스님의 유머와 코믹한 입담이 이번 여행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할것 같다. 

중국의 오천년 역사를 보고자 한다면 '하남(河南)으로 가라'하듯이, 하남은 황하문명의 발상지로 한족의 수도나 다름없는 지역이다. 그러나 현대의 중국에 들어서는 이미지가 굉장히 나쁜 곳이라 한다. 말하자면 수많은 지역차별에 시달리는 동네북처럼. '허난성 사람은 '음흉하다', '거짓말쟁이' 정도는 약과고, 흉악범죄가 일어나면 '허난성사람이다'라는 인식마저 널리 퍼져 있을 정도라 한다. 심지어 허난 사람의 취직이력서는 받지 않을 정도이며 채용 공고에서도 버젓이 허난사람은 배제할 정도라 한다. 또한 짝퉁 물건은 허난인들이 만들어낸다는 인식과 사기꾼이라는 편견도 있다. 즉 해외에서 외국인들이 중국인에 지니는 부정적 이미지가 대부분 허난인들에게 투영되고 있으며 어찌나 지역적 차별이 심했던지 허난성의 인민정부가 '우리는 마귀가 아닙니다' 라는 지역차별 반대 캠페인을 벌이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하니, 허난인에 대한 이미지가 이처럼 나빠진 원인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고 한다.

허난이 전통적으로 중국 각지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던 시절부터 상업이 발달했고, 상인들을 사기꾼에 가깝게 인식하는 전통적인 시선 때문에 허난 사람들에 대한 간사한 이미지가 고착되었다는 설과, 춘추 전국 시대의 정나라 시절부터 상업의 발달로 유명했으며 장사꾼을 의미하는 상인이라는 어원도 상나라 사람이란 뜻에서 유래되었다는데, 그 상나라가 위치한 지역이 바로 허난이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적 역학 관계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교통의 요지였으니 세력의 각축장으로 춘추시대부터 주나라를 밀어내고 북쪽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초나라와, 주나라 중심의 봉건 질서를 지키려는 진나라 세력이 맞붙는 지역이 됐다. 그러니 이 지역에 있던 정나라 같은 소국들은 그때 그때 초나라 편에 붙었다가 때로는 진나라 편에 붙기도 하면서 나라의 명맥을 겨우 이어갔는데, 심지어 한 해에 세 번 항복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을 정도라 하니, 당대에 정나라는 못 믿겠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더불어 풍속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연관성이 있는 설인데, 정나라는 춘추시대 이후로 풍속이 음란하기로 유명했다. 시경에서 조차 대놓고 '정나라에는 음란한 노래가 많다'고 했을 정도였으며 탕녀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온 하희 역시 이곳 정나라 출신이라 한다. 이뿐 아니라 송나라 무장 악비를 모함해 죽인 간신 진회가 허난성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제 진회는 허난 출신이 아니고, 오히려 악비가 허난출신이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처럼 우리의 지역차별도 이에 못지 않게 매우 심했다. 서북(평양)인과 유림의 지역적 당파인 남인 특히 영남남인에 대한 차별과 오늘날 현대에 들어서 더욱 심해진 '호남홀대론'등등... 

지역과 신분차별은 부당하다고 보며 공정성에도 어긋날 뿐아니라, 국론분열에 일조하는 편견으로 속히 사라지길 고대하여 본다. 제도와 이념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인종과 국가간에도 궁극적으로 실현해야 할 가치는 결국 자유와 평등이다. 

두시간 남짓 짧은 비행을 하여 도착한 중국은 예전과 비해 다소 침체된 감이 있었다. 젊은 세대의 활기도 시들했고 이는 한국과 중국이 동반하여 겪고 있는 고령화와 양질의 일자리 부족 탓인가. 예전에 보고 느낀 그러한 중국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지난 여름의 무더를 잊게 해준 원작 나관중의 삼국지만큼 이세상에 재미있는 책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권법이 난무하는 전쟁터의 이야기는 끊임없는 야망에 불타는 뭇사내들의 성공욕구를 더욱 자극하기 마련이다. 남자들이란 술좌석의 주요 화제가 그저 쫄병시절의 군대이야기이고 하다 못해 군대에서 발축구한 이야기를 각색하고 더 살을 보탠 무용담을 밤새 하고도 여력이 남아 있을 만큼, 전장 놀이란 인간 사내와 동물 숫컷들을 흥분시키는 생존력과 번식력 만큼의 관심사이며 늘 끊임없는 소재의 스토리텔링이 아닐 수 없다. 

지방지와 인텃넷 매체에 몇편의 칼럼을 기재했다. 그 후속타로 일본의 센코쿠시대를 몇줄 더 요약을 해 보노라면, 많은 지역으로 나뉘어진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말엽에 걸친 전국시대 그 난세를 평정하고 통일을 이뤄내는 파란만장한 역사에서 소재를 얻어 쓴 대하 장편소설이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의 대하소설 '대망'이다. 절세의 이야기꾼 나관중의 '심국지'에 비하여도 결코손색이 없다. 그만큼 재미와 흥미도 가득하지만 대부분 길거나 생소한 인명을 기억해내면서 읽다가는 쉽게 포기하거나 접기도 하는 '대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삼영걸'의 성공과 좌절을 다룬 단행본이다. 그 발매량은 무려1억 부 이상이나 팔렸다고 하니, 가히 일본의 국민 소설이라 할만큼 큰 인기가 있었으며 전후 패망의 아픔에서 새롭게 도약을 향한 추스림에 일조를하기도 했다는 후세인들의 평이 있다. 

삼영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중심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등이 활약한 시대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수백개로 나뉘어진 일본을 하나로 통일한 그들의 성공배경과 인생을 살아가매 중요한 결정을 짓는 것은 주어진 환경도 재능도 아니었으며, '인생을 어떻게 바라 보느냐'라는 관점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러한 인생관이 자신의 삶뿐 아니라 주변의 인생에도 영향을 끼치고 타인의 삶과 주변인들이 걸어야 하는 길, 그리고 그운명도 달라지게 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일본이 있기전에는 나라 전체가 온통혼란과 혼돈의 도가니였다. 단계적으로 이를 통일해 나가며 차례로 패권을 거머 쥔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이 세 사람의 인생관에 따라 많은 죄없는 인명이 죽어나가기도 하고 비참한전쟁의 참화와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그러더니, 어느 한 순간 거짓말처럼 '도쿠가와 시대'세상에 평화도 왔다. 한 지도자의 인생관이 많은 변화와 차이를 창출해 낸 거다. 

성급했고 파격적인 개혁가 오다 노부나가, 처세와 난세의 능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인내하며 참고 기다린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중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주군이기도 했던 노부나가는 저돌성과 잔인한 성격으로 전국시대를 거의 종식시켰지만, 부하가 공을 세웠을 때 칭찬에 너무도 인색했으며 논공행상에서도 형평성을 저버렸다. 아직도 문제제기가 끊이지를 않으며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든 아케치 미쓰히데에 대한 의문은 여러 다양한 논란들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는데, 승리하여 공을 세워도 주군이 표현을 제대로 않자, 내심 후계자로 생각했던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가 자기보다 히데요시를 더 신임한다고 생각해서였나 하루아침에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혼노지에서 습격을 당한 노부나가는 다급히 절을 불태우고 자살하게 되었다.

이것은 모택동의 후계자가 되었던 임표가 주위의 견제가 심해지니, 그 압박감에 모택동의 암살을 시도했던것과, 박정희를 시해한 김재규가 차지철과의 권력암투에서 밀리자 비롯되었다는 설 등이 있듯, 난세의 영웅에게, 치세에 돌입하여서는 2인자의 역할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노부나가가 실패했고, 모택동,박정희 이들의 몰락의 이유를 분석해 보면 결국 2인자의 마음을 얻지 못한 원인이 그몰락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만큼 2인자나 측근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유방에게는'장량'이라는 지혜로운 참모가 있었고, '한신'이라는 불세출의 장수가 있었으며, '소하'라는 뛰어난 승상이 있었다. 바로 이 세 사람이 유방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었기에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항우와의 싸움에서 마침내 유방이 승리를하여 천하를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몰락한 리더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난 어느 누구의 조언이나 충언을 귀기울이지 않는다. 아랫것들인 너희들의 일이란, 그저 내 기분을 맞추어주고 아부나 하며 금품과 미식이나 가져다 받쳐라. 판단은 내가 한다" 

꼭 이렇게 말한 그의 몰락은 이미 예고된 수순이었다.

탄탄스님 (서래사 주지·동국대 출강) han378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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